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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대회 공연극본 4.모노드라마 (제10회 한국여성대회, 1994) 본문

역대 한국여성대회(제1-36회)/제1회~10회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대회 공연극본 4.모노드라마 (제10회 한국여성대회, 1994)

여성연합 2011. 2. 20. 01:46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공연된 극 프로그램 대본

4. 모노드라마 (제10회 한국여성대회, 1994)


모노드라마



기획 | 여성문화예술기획

극본 | 안일순

연기 | 김지숙




1

(까페에서 잔잔한 음악 들린다.)


어머, 얘, 너 도대체 몇 년 만이니? 어쩜 너 이렇게 예쁘니? 하나도 안변했다. 얘.

그대로다, 그대로. 나? 아유 그런소리 하지마. 나 요새 폭삭 늙었어.

신경쓰는 게 어디 한두가지여야 말이지. 넌 집에서 살림만 하니까 잘 모르지?

참 애는 몇이야? 둘? 아유 좋겠다. 나? 응, 하나야. 뭐 신세대 스타일이라고? 아니야.

직장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거지. 그나저나 결혼생활은 어때? 평범해?

평범한 게 좋은 거 아니야? 뭐 옛날 생각난다고?

그래, 너 6.29 그 때 우리 그때 살맛 났었지. 처음 노조 결성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외치고, 파업하며 밤새던 일. 그걸 아직도 기억하는 구나. 아직도 그 옛날 동지의식이 생생하다고?

좋아지긴 뭐가 좋아지니. 겉으론 그래도 속으론 여전하다 여전해.

미혼 때만 해도 실감나진 않았었지. 여자 정년 30세인 줄 누가 알았겠니.

결혼하자마자 사방에서 복병들이 무섭게 덮치는데, 얘 말도 마라.

결혼식 올리고 직장에 나오니까 일단 시든 꽃 취급하더라고. 거기까지는 괜찮아.

문제는 임신해서부터인데 말이야. 점점 불러오는 배를 안고 회사에 출근하니까 무슨 야만인 대하듯 하더라. 나참 기가 막혀서. 게다가 애를 낳고 나서는 미친년 널뛰듯 살았어.

집과 직장을 오락가락하며 24시간 전쟁 치르듯이 말이야.

애 낳을 때가 임박해오니까, 애를 어떻게 해야될지 걱정이 되더라고.

시골 부모님께 보낼까, 이궁리 저궁리 하다가 가까스로 탁아소를 구했지.

근데 얘 우리애 무슨 일로 잔병이 그렇게 많니.

설사에 감기에 홍역까지 골고루 병이니 툭하면 조퇴요, 툭하면 결근.

남편은 출근한답시고 새벽같이 튕 나가버리지. 생각다 못해 옆집아줌마에게 애를 맡겼어.

월급 60만원에 30만원 주고 남는 것은 30이야. 이렇게 미련한 짓이 어디있니.

그래도 나는 사무직이니까 망정이지 생산직은 어떨까 싶더라.

게다가 동네 여자들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 나가는 나를 보고 ‘허영이 잔뜩 들어 애 팽개치고 잘난척하며 설쳐대는 여자’라고 마른 오징어 씹어대듯 씹어대더라고.

이렇게 애달복달 살았어.

근데 말이야 바로 어제야. 얘는 아파 보채고 그나마 아줌마가 갑자기 못오시겠다고 연락이 온거야. 이노릇을 어떻게 하니? 기가 막히고 답답하더라. 이 넓은 하늘에 우리 아이 맡길 곳은 없고, 아픈애 놔두고 갈 수 없고.

할수없이 우는 아이 등에 업고 지하철을 타고서 출근을 한거야.

회사 청소부 아줌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는데 일손이 잡히니?

때마침 지나가던 사장이 어린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당장에 호출이더라.

그래서 난 그랬지. 사장님께 머리 조아리고 정중히 말이야.

그동안 노조에서  끈기있게 건의한 육아 휴직에 직장 탁아소 얘기를 꺼낸거야.

얘 사실 말이야. 여성들이 다음 세대 노동자를 생산하지 않는다면

기업은 일꾼들을 어디서 구하니. 나는 거시적 국가적 인류적 안목으로 정중히 얘기한거야.

사장이 뭐라는 줄 아니?


“허, 그래요? 아 쉬고 싶으면 안 나오면 될 거 아뇨.

게다가 출산휴가 받아먹고 생리휴가 받아먹고 남자 직원들은 숙직이요 철야근무 하는데, 직장탁아소?

여직원은 청첩장이 곧 사표 아니던가? 내 그간 남자직원 열몫하는 미스 안 능력봐서

썼지만 이건 갈수록 태산이로군. 직장 탁아소?

내가 자선사업가는 아니잖소! 그러잖아도 노조가 있어서 해마다 임금인상에, 국제경쟁은 치열해지고 자금회전은 안되지. 바로 당신같은 인건비 높은 기혼여성들 떡 지키고 앉아 값싼 미혼여성들 앞길 막는 것 아뇨? 도대체 뻔뻔스럽기는....

블라우스 앞자락에 젖국물 밴줄도 모르고 타이프를 두드리고 앉아있는 여직원을 보면 칠칠맞고 추접스럽다못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니까.

(상냥하게 회유하는 말투) 그러지말고 미스안, 내 말 좀 들어봐요.

차체에 촉탁직이니 계약변경해서 파트타임으로 하는 게 어떻겠소? 아 지옥철타고 출퇴근하는 고역도 없고, 애 재워놓고 집에서 일하니 아이한테도 좋고 내 반찬값 정도는 확실히 보장해 줄테니 말이야.

아 솔직히 말해서 지금이라도 용역회사에 전화걸면 제까닥 온다고.

미스안 월급 반값이면, 시간제, 촉탁제, 파트타임, 파견직도 마다않고 올사람이

줄줄이 있다고. 지금 일자리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시오?

아 한양방송이니 신문사니 아무리 파업을 해도 신문, 방송 눈하나 깜짝않고 나오잖아.

다 비정규직 곧 임시노동군단을 쓴 까닭 아니겠소.

아무리 노조에서 호봉 가지고 단식농성 들어가 봐요.

이런 마당에 뭐? 회사에 나와서 애 젖까지 먹이게 해달라고? 하하하하..

자고로 애는 엄마가 길러야 하는 것 아니요.

여자가 결혼을 했으면, 남편이 먹여살리는데 무슨 일이 그렇게 하고싶단 말이요.

남자가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여자를 밖으로 내돌리나? 츠츠츠츠 (혀를 찬다) “


내 남편을 모독하는 그 소리에 별안간 참을 수 없이 화가 솟는거야.

홧김에 사장 책상 위에 서류철을 쓸어 모아 사장새끼, 어머 내가 새끼라고 했니?

사장새끼, 아유 자꾸 그 말이 나온다. 얘, 아무튼간,

그 사장새끼 머리위에 확 던져버렸어. 그리고 따발총처럼 쏘아댔어.


“사장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저도 이 회사에 남자와 똑같이 당당하게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제가 학력이 모자랍니까? 능력이 모자랍니까?

사사건건 남자들과 차별대우 하고 수습기간에 월급 데먹고 수당에서 차별하고,

자금대출 거부하고, 연수에서 차별하고, 승진에서 누락하고, 잡무에만 배치하구요!

남자사원 비서취급하구요! 어디 그 뿐이에요?

고객관리니 대인관계니 중요한 업무는 모두 남자에게만 돌리고 연수라고 시키는 건 예절교육 뿐이구요. 그리고 여자는 직업의식이 없다느니 결혼하면 끝이라느니 결혼이 무슨 산재라도 된단 말입니까? 임신이 무슨 전염병이라도 된단 말이에요?

과다업무에 호봉까지 묵어놓더니만 이제 촉탁직으로 계약변경 하자구요?

전 이대로 절대 물러서진 않겠어요.

내 뼈를 이 회사에 묻을 때까지 내 책상을 지킬 거예요.

하지만 오늘은 아이가 너무 아파서 오늘만 일찍 조퇴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쏘아대고 나서 여왕처럼 도도하고 황녀처럼 오만하게 치맛자락 펄럭이며

그 길로 아이를 찾아업고 회사문을 나선거야.

근데 말이야 애업고 나서는데 왜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더라고.

우리 애를 물건처럼 이리 맡기고 저리 맡기고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냉대를 받아가며

이 직장에 목을 매는거야? 반찬값이 아쉬워서? 13평에서 30평으로 가려고? 자가용 탈려고?

울먹이는 어린것을 들쳐업고 그 매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갈 때, 난 말했지.


“지혜야. 너랑 나랑은 절대 울지 않기.

네 할머니, 이모 언니들처럼 눈물과 한숨과 순종 속에 우리 살아가지 말고

당당하게 당차게 살자, 응?

이고개가 힘들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자.

우린 벼랑에도 우뚝 선 그런 여자가 되는 거야. 알았지? 우리 지혜 알았지?”

얘, 그때, 우리 지혜가 엄마 말을 알아들었는지 울음을 그치더라고.

그 예쁜 눈으로 날 말똥말똥 쳐다보는거야.

그 모습은 엄마 울지 않기, 엄마 울지 않기를 약속하는 것 같았어.

오냐 당차게 살아야지. 일터를 지키고 가족을 돌보며 당당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우리 모녀간에 수십번을 다짐하듯 그길을 걸었어.

난 이런 식으로 몇 년 살았어.

아휴, 말해놓고 나니까 후련하다.

근데 너 왜 아까부터 한마디 말도 안하는 거지? 너.. 왜.. 꼼짝않고..

나를 그런 눈초리로 보는거야? 내가 초라해보이는 거니? 진흙탕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지?

뭐? 당당해보인다고? 뭐가 자랑스럽니? 애가? 옛동지라고 나 위로하는 거야?

정말? 정말 내가 부러워? 기집애. 친구야 고맙다.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나 다시 정말 신이 나. 살것 같아. 힘이 막 솟는다. 얘.

그래, 우린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역시 친구야. 너는 집에서, 나는 직장에서, 우리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고 살자.

하지만 얘, 이게 우리가 각자의 가정, 일터에서 노력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애.

법이니, 제도니, 뜯어고칠 게 너무 많아.

그러자면 지방의회 감시도 우리가 해야 되고. 여자 국회의원도 우리 손으로 많이 뽑아야 하고 말이야. 여자들도 정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얘기가 갑자기 튀지? 그렇지만 얘, 이건 사실이잖아.

오늘 여성상 수상한 홍미영씨만 해도 봐라. 얼마나 대단하니.

동네에서부터 여자들이 힘을 모아 밀어주고 나서고 하니까 이링 되잖아.

너와 나도 그렇게 손을 꼭 잡고 함께 가자.

우리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

(음악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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