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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38여성대회를 맞아 선배들의 투쟁을 생각한다. 본문

3.8칼럼

38여성대회를 맞아 선배들의 투쟁을 생각한다.

여성연합 2010. 3. 3. 11:43

38여성대회를 맞아 선배들의 투쟁을 생각한다.


권미혁(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해마다 여성운동에서는 38대회를 연다.

1908년을 기점으로 하면 전세계적으로는 여성대회가 102번째이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는 1985년 '민족·민주·민중과 함께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여성단체들이 연대해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한 것을 1차로 할 경우 2010년은 26회 째가 된다...

그러나 38여성대회는 한국에서 무려 1920년대부터 기념행사를 치러왔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여성대회가 해마다 당시 여성들이 처해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점과제를 선정하고같이 실천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할 때 이미 1920년대에 38여성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실제 일제하 여성투쟁의 기록을 보면 지금 주장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여성적 이슈를 내걸고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31년 평원고무공장노동자의 파업이다.

당시 세계공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조선의 고무신발공장들은 손해가 컸다.

1930년 5월 고무공업 자본가들의 모임인 '전조선고무동업연합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평균 10% 깎겠다고 발표했다. 8월 1일에 '평양고무동업회'에선 17%의 임금을 깎겠다고 평양고무직공조합에 알렸다.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인하 반대, 해고반대' 등 20여개 조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8월 7일 아침부터 5개 공장 1천 800여 명이 파업에, 6개 공장에서는 태업을 벌였다. 8월 11일에는 고급기술 노동자를 포함한 기계공 3백여 명도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노동자는 2천여 명을 넘어섰다.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9월 초까지 이어졌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노동자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 방을 따로 만들어 여성노동자들끼리 움직이는 파업본부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8월 10일 노동자대회에서는 임금인하 반대와 해고 반대 뿐 아니라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같은 모성보호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파업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우리 나라 최초의 고공농성투쟁을 벌인 여성노동자 ‘강주룡’이었다. 강주룡은 평양고무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광목을 한 필 사가지고 한밤중에 을밀대를 찾아 올라갔다.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당시 조선 노동자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파업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강주룡의 이같은 활약으로 임금인하와 노동자 해고를 막아냈다. 물론 당사자인 강주룡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아 빈민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38여성대회가 미국의 1만5000여 여성노동자들이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이 그 기원이라면 강주룡을 비롯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야말로 38정신에 가장 걸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 38대회를 맞아 현대사의 굴곡 몾지 않게 역동적이었던 선배여성들의 투쟁을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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